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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숨쉬는곳 - 백제

아이두3 2008. 7. 16. 08:04

1. 日本이 숨쉬는 곳 - 백제

부여에서 외국인이 묵어갈만한 숙소는 부여 유스호스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부여는 오래 전부터 일본인 관광객이 끊임 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부여 유스호스텔 계단과 복도에는 여기를 다녀간 수학여행단의 단체기념사진이 죽 걸려 있는데 그들은 무 엇 때문에 불편한 교통과 숙박시설을 마다 않고 부여를 찾아오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인들이 그들 문화의 원료(源流)로서 백제문화라는 역사적 향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고대사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한국사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그것에 비교될 만큼 크고 막중하다. 지금 많 은 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고 심지어는 민족적 대립감정과 결합하여 거의 허구적인 이론까지 제시되기도 하지만 일 본인들이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백제문화인 것이다.

2. 日本 古代文明의 탄생

우리나라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신석기시대인 죠몽시대(BC4세기이전)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청동기인들의 청동기 문화전래로 야요이시대(BC4세기-AD4세기초)를 열게 하면서 마감되었다. 4세기 초에는 역시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가 전래되어 일 본 사회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시켜 이른바 고분시대(4세기초-7세기 중엽)를 맞이하게 된다. 고분시대에는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 해 주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큰 무덤이 조성되고, 신라, 가야토기와 같은 질을 지닌 수에키(須惠器)가 나타나 4세기 후반이 되면 야마도(大和)정권이 일본 국내를 통일해 간다.
고분시대의 후반인 6세기 초부터 7세기 중엽까지는 아스카(飛鳥)시대라고 해서 일본 역사의 무대는 규슈(九州)지방에서 긴기 (近畿)지방으로 옮겨지며 쇼도쿠(聖德)태자 시절에는 체제와 면모를 갖춘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문명의 개화에 백제의 신세를 단단히 지게 된다. 일찌기 왕인(王仁)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고 (285년), 4세기 중엽 근초고왕때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일본에 도기, 직조, 그림 등의 기술을 전래하였으며, 무령왕이 오경박사 단양이(段陽爾)와 고안무(高安戊)를 파견하고 성왕이 552년에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보내 처음으로 불경과 금동석가여래상을 전래한 것은 일본 아스카문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국가 문명의 탄생과 전개과정에서 백제를 비롯한 삼국이 끼친 영향은 단순히 외교적인 문화교류에서만 이 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반도로부터 끊임없이 이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들이 가져간 문화의 내용들이 일본 고대국가 문화 창조의 힘이 되었으며 바로 그 이유로 아스카문화의 원류는 백제에서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3. 韓民族의 日本移住

한민족의 일본에로의 집단이주에 대하여는 일본의 세계적인 고고학자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1959년 '기마민족 도래설 '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에가미가 주장한 내용은 "일본의 고분시대는 전기인 4세기와 후기인 5-7세기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고분출토 유 물에 마구와 갑옷 등 기마민족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되는 것에 주목하여 북방 기마민족의 정복왕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나라 일부 학자와 소설가들이 만들어 내는 가야왕조 일본정복설과 비류백제 이주설 등이다. 그러나 이것을 일본의 대부분 학자들은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渡來人), 일본말로 '도라이진'이 가져온 문화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대 부분의 일본 역사, 문화사 책들은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설명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고구려의 남하(南下)는 동아시아 세계를 커다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집어넣었다. 조선반도 남부 의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직접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또 철 지원을 가야에 의존했던 왜(倭) 또한 고구려와의 싸움에 휘 말리게 되었다.
강력한 고구려 기마군단과의 접촉은 기마전법이나 승마의 풍습을 일본인들이 배울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5세기 이후 일본고분에 마구(馬具)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 전란이 계속되면서 일본으로 건너오는 도래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파도처 럼 일어나게 되고 일본열도에는 왜인(倭人)들의 생활자체가 큰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확실히 5세기는 일본 고대에 있어서 문명개화의 시대이며 왜국이 문명사회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달한 때이며, 이 문명개화의 주역이야말로 '도래인'이었다.
그 도래인 중에서 수에키(須惠器)라는 토기문화를 일으켜 준 이는 가야인들이며, 불교미술문화를 일으켜 준 이는 백제인들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4. 불교의 傳來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552년이지만 최초의 절인 아스카지(飛鳥寺)를 짓기 위하여 백제에서는 588년에 승려 6명과 조사 공(造寺工), 와박사(瓦博士), 화사(畵師) 등 6명의 전문가들을 나라에 파견했다. 지금은 형편없이 퇴락한 절로 남아있는 아스카 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1탑3금당'식이었고, 와당들은 백제의 것과 거의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처럼 백제로부터 전수받은 아스카시대의 불교미술은 백제문화의 영향에 놓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스카시대의 초기 불상들은 보통 '도라이요시키(渡來樣式)', 즉 해외양식이라는 뜻으로 결국 백제양식이라는 의미의 도래양식이다.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의 속칭 구다라 관음(百濟觀音)으로 불려지는 목조관음보살입상과 교토(京都)의 코류지(廣 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일본의 구국보 제1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코류지는 옛날 한반도에서 도래한 귀화인의 자 손인 하다노 가와가츠(秦河勝)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일본서기'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호류지의 백제관음', '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으로 대표되는 아스카 시대의 도래불상의 형식은 말할 것도 없이 백제양식 을 띠고 있으며, 부여박물관을 찾아 온 일본인 관광객들은 여기에 진열된 작은 금동불상, 이를테면 규암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이 나 삼산관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보면서 일본문화의 원류로서 백제문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도래인에 의하여 개창된 아스카시대의 불교문화는 점차 일본사회에서 토착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는 호류 지의 금당에 모셔진 동조(銅造)석가삼존상에서 찾고 있다. 625년에 주조된 이 불상은 도래양식에서 훨씬 벗어난 일본화의 분위기 를 띠고 있는데 이 불상을 제작한 불사(佛師)의 이름이 도리(止利)이므로 흔히 '도리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도리불사는 도래인 제3세이며,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은팔찌 제작자 이름이 다리(多利)인 것과 연관되는 점이 있다.

5. 백제의 문화유적

이와 아울러 일본인 관광객들이 부여와 공주를 답사하면서 느끼는 공통된 감상은 그 주변의 자연 풍광이 일본의 지형 중에서 도 아스카, 나라지역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땅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그네들의 고향과 비슷한 곳에 정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한다.
부여의 백제문화 유적을 찾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볼때마다 내 머리에 스치는 두가지 의문은 아직껏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 한 채로 남아 있다. 하나는 일본문화의 원류로서 백제문화를 확인한 일본인의 가슴속에 일어나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신기함, 고마움, 동질감, 아니면 냉랭한 역사의 확인, 또 하나는 아스카와 교토와 나라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의 선조인 그곳의 도래인들 의 유적을 음미하며 더듬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되며, 거기서 무엇을 느낄까?
이것은 그저 물음일 뿐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유홍준 글에서 발췌)